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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이 있는 시

아무 날의 도시,외 / 신용목

by 바닷가소나무 2014. 9. 29.

 

 

 

아무 날의 도시,외 2

 

 

식당 간판에는 배고픔이 걸려 있다 저 암호는 너무 쉬워 신호등이 바뀌자

어스름이 내렸다 거리는 환하게 불을 켰다

빈 내장처럼

 

환하게 불 켜진 여관에서 잠들었다

뒷문으로 나오는 저녁

 

내 머리 위로도 모락모락 김이 나는지 궁금하다 더운밥이었을 때처럼

방에 감긴 구불구불한 미로를 다 돌아

한 무더기 암호로 남는 몸

 

동숭동 벤치에서 가방을 열며 나는 내가 가지지 못한 내과술에 대해 생각한다

꺼낼 때마다 낡아 있는 노트와 가방의 소화기관에 대해

 

불빛의 내벽에서 분비되는 어둠의 위액들 그 속에 웅크리고 앉아 나는

너를 잊었다 너를 잊고 따뜻한 한 무더기

다른 이야기가 될 것 같다

 

한 바닥씩 누운 배고픈 자들이 아득히 별과 별을 이어 그렸을 별자리 저 암호는

너무 쉬워 신호등이 바뀌자

거리는 환하게 어둠을 켰다 빈 내장처럼

 

약국 간판에는 절망이 걸려 있다

 

 

 

죽은 자의 노래로부터

 

태양이 종소리에 감겨 조금씩 꺼져갈 때 십자가에 찔려 금 가는 하늘에

박혀 있던 벽돌을 후드득 떨어지고

튀어오르는 어둠이 달리는 타이어 은빛 추위에 치여 창문마다 검은 피를 뿌릴 때

 

나는 죽은 자의 메아리를 잘라왔다 불탄 구름이 흐린 재로 흩날리는 광장에서

목을 잃은 혀가

부르는 노래 시체의 목소리 속을 떠도는 바람의 목에 걸어주는 긴 머플러

 

녹빛 동상의 입에 쏟아지는 무용담과 장검이 찌르고 있는 칼집l 속의 오랜 적막을

그리고 도심의 방 환한 무덤에 쌓여 있는 종이를 관짝의 먼지 뚜껑을 열고

시체의 배 속에 남아 있는 밥알을 씹는다

얼굴에 어둠을 묻힌 체 이제부터 나는 뒷걸음질로만 나갈 수 있으므로

 

낮과 밤 사이에서 벽돌들로 시간의 양쪽 끝을 눌러놓고 길 잃은 메아리

위에 적혀 있는 노래를

몸의 불구덩이로 던져 넣는다. 밤이 추위뿐인 영혼에게 검은 망토를 걸쳐줄 때

 

아무리 피워 올려도 구름이 되지 못하는 연기의 역사 그러나 인간이라는 거푸집에서 뜨거운 쇳물로 끓고 있는 피를

 

 

 

 

 포로들의 도시 

                                                                                                                      

  묻지 마, 어디서 왔냐고.

 

  찰칵대는 심장이 마음의 캄캄한 암실에서 현상하는 몸,

  수음으로 잉태된 생명 - 사랑에 대하여.

 

  묻지 마, 언제냐고.

  터미널,

  수천 년 전으로부터 버스가 도착하고

  수천 년 전부터의 기다림이.

  그리고,

 

  먼 강에서 주워온 자갈 속에 무덤을 짓고,

  흐름의 오랜 침대.

  숨죽임.

  아프게 일그러지는 얼굴에서 흘러내리는 강물의 푸른 화석, 그 무게로 서로의 이름을 내리치고.

  도망치자, 수천 년 전으로부터

  수천 년 전으로.

 

  너는 바닥에 떨어진 손을 꼭 쥐었다.

 

  나는 차표를 접어 물에 띄웠다.

  묻지 마,

 

  구름은 버려진 종소리처럼 펼쳐져 있다, 쓰다가 북북 찢어버린 편지처럼.

  저녁은 종탑에 올라 한 장 한 장 구름을 불사른다.

  종소리가,

  검은 재가 되어 떨어진다.

 

  처음의 무성한 풀밭 위로.

 

  묻지 마, 모든 그림자가 나를 떠나버린 밤.

  웅웅거리는 어둠의 폐벽에 귀를 대고 엿듣는다. 저만큼의 슬리퍼 한 짝과 열에 뜬 흰 벽,

  소읍 산부인과 불 꺼진 복도에 주저앉아

  우는 여자,

  붉은 환자복에 엉겨 꾸들꾸들 말라가는, 한 목숨의 처음이자 마지막 울음을.

 

  모든 그림자가 너를 덮쳐가는 밤.

 

  쳐다보면 눈이 속는 것을,

  만져보면 손이 속는 것을.

 

  묻지 마, 왜 떠났냐고.

  그것은 알 수 없는 구령의 불복할 수 없는 전언 - 우주 저편에서 불어온 바람이거나

  눈을 겨눈 총구 혹은 모든 시간의 자살,

  사라진 근원에 갇혀 돌고 있는

  피의 우물.

 

  마지막 버스는 목숨의 말라붙은 강으로 출발한다. 자갈 같은 창문을 달고서,

  수천 년 전부터 도망치는 잠을 싣고서.

  끝없이 그리워라, 물결의 창 너머

  푸른 손을 흔들며.

 

  묻지 마,

 

  중력의 울타리를 친 행성의 서러운 수용소에서

  줄지어 밥을 타러 가는 이유에 대하여.

 

 

                         시집 아무 날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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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목 / 경남 거창 출생. 2000작가세계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그 바람을 다 걸어야 한다』『바람의 백만 번째 어금니』『아무 날의 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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