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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1

흉터 / 최윤정

by 바닷가소나무 2012. 12. 8.

흉터 / 최윤정

 

 

눈보라가 치는 밤이었다. 머리에 버짐이 번져 머리카락이 숭덩숭덩 빠지는 걸 보다 못한 어머니가 나를 병원에 데리고 갔다 오던 길이었다. 두 시간에 한 번씩 들르는 마을버스는 일찍 끊겨 버렸고, 눈보라를 맞으며 한 시간은 족히 걸어가야 집에 갈 수가 있었다. "춥제?"하고 자꾸만 물어보시던 어머니의 물음에 대답도 못하고 눈보라와 씨름하던 그때, 내 나이 아홉살이었다.

 

걸음을 걷는 다리조차 감각을 느끼지 못할 만큼 온몸이 꽁꽁 얼어 집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일찍 잠자리에 들었는지 집이 깜깜했다. 어두운 방 안에서 찬 바람이 확 덮쳐왔다. 아버지는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더듬거리며 불을 켜자 아무것도 없는 빈 방이 눈에 들어왔다. 멍하니 방안에 서있으려니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어왔다. 나는 어떡하느냐고 자꾸만 어머니의 바짓자락을 잡아 흔들었다. 목석이 된 듯 말이 없던 어머니는 황량한 방만큼이나 공허해 보였다.

겨울밤 같은 날들이 지나갔다. 어둡고 매섭고 살을 에는 하루하루를 견뎠다. 고름이 나던 머리를 어찌하지 못해 아버지가 쓰던 면도기로 집에서 머리를 밀었다. 염증이 번질까봐 소금을 뿌리는 것이 어머니가 내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치료였다. 몇 년 후 내 머리에는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자국이 선명하게 남았다. 그 뒤로 사람들의 앞에 서면 누군가가 내 머리의 흉터를 머리카락으로 덮는 버릇도 생겼다.

어머니는 가끔씩 이름 모를 연고들을 사오곤 했다. 잠든 척하던 내 머리맡에 앉아 말없이 연고를 발라주셨다. 그런다고 머리카락이 다시 나지도, 함몰된 두피가 솟아오르지도 않을 터인데 쓸데없는 곳에 돈을 쓴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정말 약효가 있어 머리카락이 났으면 하고 바라기도 했다. 약을 발라주시던 어머니는 종종 나를 꼭 안아주기도 했는데 그런 밤이면 어머니보다 먼저 잠들지 못했다. 민둥산처럼 휑한 어머니의 삶이 나를 밤새 불안하게 했다.

중, 고생 시절 단발로 자른 내 머리카락은 움직일 때마다 저절로 가르마가 타져 오백 원짜리 동전만한 흉터 두 개가 드러났다. 친구들에게 아버지와 어머니를 내보인 것처럼 얼굴이 화끈거렸다. 흉터처럼 부모님은 내게 가려야만 하는 존재였다. 돌아온 아버지를 다시 받아들이는 것도, 너무 쉽게 아버지를 용서하는 어머니를 이해하는 것도 힘들었다 어느 날 밤, 술에 취한 아버지가 들려주신 할아버지의 이야기는 먼 나라의 전설처럼 아득하게만 느껴졌다. 10살을 갓 넘긴 아버지를 두고 떠나버렸다는 할아버지는 오래되지 않은 흉터처럼 툭 불거져 밤마다 나를 간질여댔다.

내가 결혼을 하고 난 다음부터 어머니는 이상한 연고들을 더 이상 사오지 않았다. 아예 잊으신 듯, 내 머리의 흉터 따위는 신경 쓰지 않으신다. 마음속에서 그 일을 사위에게 넘기신 건지 아니면 이제 할 만큼 했다고 생각하시는 건지 모르겠다. 오래 전 야간자율학습을 마치고 온 내게 아버지가 내밀던 발모제를 나는 오랫동안 가방에 넣고 다녔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머리카락을 길려 묶으면 된다고 말했지만 가끔씩 나는 일부러 아버지가 보는 앞에서 연고를 바르곤 했다. 내 머리를 낫고자 함보다는 아버지의 가슴 속에서 생채기를 내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등 뒤에서 나를 바라보시던 아버지와 거울 속에서 눈이 마주칠 때마다 나는 웃어 보였다.

나는 이제 내 머리의 흉터가 부끄럽지도 않고 일부러 가리려고 애쓰지도 않는다. 흉터는 시간이 지나면서 내 몸의 일부가 되었다. 마치 태어날 때부터 내게 존재했던 것처럼 그것은 내가 나임을 말해주는 표식이 되기도 한다.

 

흉터는 잊지 못할 이야기 하나가 오롯이 남아있는 자국이 아닌가 생각한다. 우연히 다른 사람의 흉터를 보게 될 때면 거기에 담긴 사연을 상상하게 된다. 상처의 크기만큼 마음에도 피가 나고 진물이 난다. 딱지가 앉아 잊고 지내다가도 문득 아픈 기억들은 스멀스멀 기어 나와 흉터를 간질인다. 그 흉터가 자기 몸의 일부로 완전히 스며들 때까지 순탄치만은 않았을 그 사람의 지난날들을 생각한다. 사연의 반흔이 깊고 클수록 애잔해져 나도 모르게 손으로 쓰다듬어 주고 싶기도 한다. 저 흉터가 하는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누군가 다른 사람도 내 흉터가 하는 이야기들을 들어줄 것만 같다.

유난히 추운 겨울밤에는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온다. 당신의 마음이 시려서, 내 마음도 시릴까 봐 전화를 하신다. 통화할 때마다, 아버지 마음에 난 흉터의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항상 고민스럽다. 오늘 밤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온다면 내가 가진 흉터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들 그런 표식 하나쯤은 가슴에 품고 산다도 말하고 싶다. 이젠, 아버지의 완전히 아문 상처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을 한번 들어보고 싶다. 어릴 적 외할머니의 무릎을 베고 듣던 옛날이야기처럼 늘 외롭던 내 마음을 달래줄 것 같다. 스르르 잠든 내 머리를 따뜻한 손으로 쓰다듬어 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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