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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물방울들은 / 나희덕: 저 물방울들은 / 나희덕 그가 사라지자 사방에서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수도꼭지를 아무리 힘껏 잠가도 물때 낀 낡은 싱크대 위로 똑, 똑, 똑, 똑, 똑...... 쉴 새 없이 떨어져 내리는 물방울들 삶의 누수를 알리는 신호음에 마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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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캄캄한 돌 / 나희덕: 캄캄한 돌 / 나희덕 메카의 검은 돌은원래 흰색이었다고 해요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쫓겨나면서손에 움켜쥐고 나온 돌,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와입 맞추고 만지는 동안고통을 빨아들여 캄캄한 돌이 되었다죠 내게도 검은 돌 하나 있어요그 돌은 한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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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밤 / 나희덕: 푸른밤 / 나희덕 너에게로 가지 않으려고 미친 듯 걸었던 그 무수한 길도 실은 네게로 향한 것이었다 까마득한 밤길을 혼자 걸어갈 때에도 내 응시에 날아간 별은 네 머리 위에서 반짝였을 것이고 내 한숨과 입김에 꽃들은 네게로 몸을 기울여 흔들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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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나희덕 :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 나희덕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나 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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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수틀 / 나 희 덕: 오래된 수틀 - 詩' 나 희 덕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 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 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 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속에서 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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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마른 물고기처럼 / 나희덕 어둠 속에서 너는 잠시만 함께있자 했다 사랑일지도 모른다, 생각했지만 네 몸이 손에 닿는 순간 그것이 두려움 때문이라는걸 알았다 너는 다 마른 샘바닥에 누운 물고기처럼 힘겹게 파닥이고 있었다, 나는 얼어죽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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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망설임 없이/김충규: 아무 망설임 없이/ 김충규 살얼음 같은 어둠을 쪼개며 나비가 날아왔다 쪼개진 틈새로 딱딱해지지 않은 액체의 어둠이 주르르 쏟아졌다 날개가 젖어서 나비의 비행이 기울었다 관을 열고 온몸이 얼룩진 시신이 나와 나비 쪽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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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옮겨가는 초원 / 문태준 : 옮겨가는 초원 / 문태준 그대와 나 사이 초원이나 하나 펼쳐놓았으면 한다 그대는 그대의 양 떼를 치고, 나는 나의 야크를 치고 살았으면 한다 살아가는 것이 양 떼와 야크를 치느라 옮겨 다니는 허름한 천막임을 알겠으나 그대는 그대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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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억새꽃, 이제 큰일 났다 / 배한봉: 물억새꽃, 이제 큰일 났다 / 배한봉 허옇다 저 물억새꽃, 2미터가 넘는, 서걱거리는, 11월의 우포늪 물억새 숲길을 걸으며 그 물억새 몸이 발갛다는 것을 안다 발갛게 달아올랐다가 검붉게 마른 몸에서 기린 목처럼 쑥 뽑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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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를 들려주는문자(紋章) /차 주 일: 소리를 들려주는문자(紋章) / 차 주 일 거미가 실을 잣아 영역을 넓힌다 넓힐수록 좁아드는 평생 감옥을 밤새 개간한다 밭두렁 같은 그물에 붙들린 허공에서 거미가 구름을 뜯어먹고 바람을 경작한다 부대밭 다랭이 몇으로 일가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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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농담/천양희 : 오래된 농담/천양희 회화나무 그늘 몇 평 받으려고언덕 길 오르다 늙은 아내가깊은 숨 몰아쉬며 업어달라 조른다합환수 가지끝을 보다신혼의 첫밤을 기억해 낸늙은 남편이 마지못해 업는다나무그늘보다 몇 평이나 더 뚱뚱해져선나, 생각보다 무겁지?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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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는 당당하다 / 김선진: 나무는 당당하다 / 김선진 바람의 길을 몰라 늘 허둥대던 무성 했던 나뭇잎 이제 갈 길을 찾았는가 우수수 떨어진다 벗은 나무는 홀로 있어도 언제나 당당하다 한 뼘 모자라는 그리움에도 애끓지 아니하고 두 뼘 모자라는 그리움에도 눈 짓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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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집 앞 / 기형도 : 그 집 앞 / 기형도 그날 마구 비틀거리는 겨울이었네 그때 우리는 섞여 있었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이었지만 너무도 가까운 거리가 나를 안심시켰네 나 그 술집 잊으려네 기억이 오면 도망치려네 사내들은 있는 힘 다해 취했네 나의 눈빛 지푸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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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 기형도: 먼지투성이의 푸른 종이 / 기형도 나에게는 낡은 악기가 하나 있다. 여섯 개의 줄이 모두 끊어져 나는 오래 전부터 그 기타를 사용하지 않는다. '한때 나의 슬픔과 격정들을 오선지 위로 데리고 가 부드러운 음자리로 배열해주던' 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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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 입 속의 검은 잎 / 기형도 택시운전사는 어두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이따끔 고함을 친다, 그때마다 새들이 날아간다 이 곳은 처음 지나는 벌판과 황혼, 나는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그를 생각한다. 그 일이 터졌을 때 나는 먼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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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포 하성 운호가든집에서 / 고형렬: 김포 하성 운호가든집에서 / 고형렬 이상한 집이었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낙엽이 떨어져 뒹구는 외진 口字 한옥 두 남자가 설거지를 하다가 우리를 맞아주었다. 오후 5시였다. 여자는 어색하게 5호실로 들어가는 남자를 뒤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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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년! 하면서 비가 내린다 / 김영남: 고년! 하면서 비가 내린다 / 김영남 비가 내린다. 비가 떠난 그녀가 좋아하던 봄비가 내린다. 삼각지에 내리고, 노량진에 내리고, 내 창에도 내린다. 내 창에 내리는 비는 지금 고년! 미운 년! 몹쓸 년! 하면서 내린다. 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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