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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수틀 / 나 희덕 : 오래된 수틀 / 나 희덕 누군가 나를 수놓다가 사라져 버렸다. 씨앗들은 싹을 틔우지 않았고 꽃들은 오랜 목마름에도 시들지 않았다. 파도는 일렁이나 넘쳐흐르지 않았고, 구름은 더 가벼워지지도 무거워지지도 않았다. 오래된 수틀 속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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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녀와 천사/문정희: 창녀와 천사/ 문정희 나 창녀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천사이며 창녀인 눈부신 시인이 되고 싶었지만 어느 때 치마를 벗을지를 몰라 어느 벌판 혹은 어느 강줄기를 따라가야 술집과 벼락이 있는 줄을 몰라 여름 날 동안 누가 주인인지를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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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共謀)/정재학: 공모(共謀)/ 정재학 죽은 지 이틀 만에 시체에서 머리카락이 갈대만큼 자라 있었다 나와 그림자들은 시체를 자루에 싸서 조심조심 옮겼다 그림자 하나가 울컥했다 죽이려고까지 했던 건 아닌데… 나머지 그림자들이 그를 달랬다 그러지 않았다면 네가 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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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엄한 저 꽃 만져보려고 / 배한봉: 장엄한 저 꽃 만져보려고 / 배한봉 해 지는 하늘에서 주남저수지로 새들이 빨려 들어오고 있다, 벌겋다, 한꺼번에 뚝뚝, 선지 빛으로 떨어지는 하늘의 살점 같다 한바탕 소란스런 저 장관 창원공단 퇴근길 같다 삶이 박아놓은 가슴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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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수지 매점/엄원태 : 저수지 매점/엄원태 저수지 옆 산길 초입에 움막을 짓고 어쩌다 오가는 산행객에 막걸리나 음료를 파는 아주머니는 곱게 늙었지만, 60줄은 좋이 들어 보인다. 그늘막 아래 앉아 나물을 다듬거나 책을 보는 게 일인데, 그 밖에 할 일이라곤 주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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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에의 꿈 / 정철훈: 누에의 꿈 / 정철훈 어느 날부터 나는 커피향이 스멀거리는 마포의 옥외 커피점에 앉아 있기를 좋아하게 되었다 실내와 실외를 구분 짓는 그 어중간한 경계에는 아무 선도 없지만 내 몸이 그 선에 얹혀 있다는 게 커피 향과 더불어 자유를 떠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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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톱 연주를 듣는 밤 / 황병승 : 톱 연주를 듣는 밤 / 황병승 타오르는 촛불 아래서 나는 약혼자에게 편지를 쓰다말고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카프카가 되었습니다 쭉정이 같은 모습으로 늙어갔을 사내 그러나 그 누구도 손가락질할 수 없을 만큼 나는 재능 있고 병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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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목수의 집짓는 이야기 / 황학주: 어느 목수의 집짓는 이야기 / 황학주 기적처럼 바다 가까운 데 있는 집을 생각하며 살았다순서가 없는 일이었다집터가 없을 때에 내 주머니에 있는 집설계도를 본 사람 없어도집 한 채가 통째로 뜨는 창은미리 완성되어 수면에 반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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