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붓끝에 투영된 애국과 매국>(종합)
(서울=연합뉴스) 권영전 기자 =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만방의 모범이 된다'고 하였다. 임금이 바르면 바르지 않음이 없으니, 이제 '정(正)'으로 호를 내려주어 힘쓰라는 뜻을 붙인다."
고종 황제가 아들 순종에게 정헌(正軒)이라는 호를 내려주며 쓴 글이다. 강하고 곧은 필체로 두껍게 먹이 밴 글씨가 '바름'이라는 고종의 뜻과 잘 어울린다.
고종 황제가 순종에게 내려준 호 정헌 |
고종이 이 글을 쓴 것은 대한제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불 같았던 1907년 겨울이다. 그는 일제의 강요로 체결된 을사늑약(1905)의 부당함을 알리고자 네덜란드 헤이그에 이준 열사를 밀사로 파견한 것이 문제가 돼 결국 그해 황제 자리에서 강제로 퇴위 된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나는 시점에서 고종이 순종에게 '임금이 바르면 바르지 않은 것이 없다'고 말하고 정헌이란 호를 지어준 데서 이 시기 고종이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있었으며 순종에게 무엇을 기대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고종과 순종이 일제의 강압에 마지막까지 항거했음을 밝힌 최근의 연구결과와도 관련이 있을 대목이다.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은 한일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23일부터 다음 달 31일까지 박물관 로비에서 특별전 '붓 길, 역사의 길'을 연다.
이번 전시는 망국(亡國) 전후 역사적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들이 쓴 필적(筆跡)을 통해 왜 나라가 망했으며 어떻게 나라를 되찾았는지를 되짚어보려는 의도로 기획됐다.
전시는 ▲쇄국과 개항 ▲개화와 척사 ▲매국과 순절 ▲친일과 항일 ▲남북공동정부수립과 남한단독정부수립 등 5가지 주제로 나누어 구한말부터 해방 이후까지를 차례로 조명한다.
박물관의 이동국 수석큐레이터는 전시에 앞서 22일 전시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글씨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사회 문제를 그대로 담고 있다는 '글씨의 사회사'를 보여주는 전시"라고 이번 특별전을 소개하며 "글씨를 통해 역사의 중심에 섰던 사람들의 생각과 선택을 볼 수 있다"고 전시의 의의를 말했다.
이토 히로부미의 한시와 김윤식, 조중응, 박제순의 차운시(次韻詩) |
이번 전시에서 가장 상징적인 전시품은 이토 히로부미의 7언절구 한시에서 운(韻)을 따서 김윤식(金允植)과 조중응(趙重應), 박제순(朴齊純) 등 당시 친일 행위에 앞장선 인물들이 지은 차운시(次韻詩)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이 시에서 "뭇 사람들과 헤어지자니 더욱더 아쉬워 / 고운 얼굴에 흰 머리는 바로 신선들이다 / 교린(交隣)의 기월이 맹단(盟壇)에 남아있으니 / 양국에 화기(和氣)가 오랫동안 맴돌리라"라고 읊었다.
여기에 김윤식은 "흰 구름, 푸른 소나무 경계가 고요하니 / 이곳에서 신선을 만날 수 있으리라"라고, 조중응은 "태사의 치마며 신발이 신선을 닮으셨네 / 동풍에 돛을 달아 귀국하시고 나서도 / 큰 꿈이 이따금 우리나라에서 뒤척이시리라"라고, 박제순은 "세상에 우뚝 선 풍모는 스스로 탁월하셔서 / 물러나 쉬는 즐거운 곳에서 신선이 되시었네"라고 이토를 신선으로 비유한 시를 여백에 적어넣은 것이다.
이 유물은 이번 전시를 통해 일반에 처음 공개되는 것이다.
이토 히로부미와 친일파들의 한시를 설명하는 이동국 서예박물관 수석큐레이터 |
'을사오적' 중 하나인 이완용이 쓴, 적극적인 친일 의지를 보여주는 한시도 전시된다.
그는 "피로써 이름을 다툼은 도리어 어리석으니 / 정성을 미루어 대중에 미쳤으니 무엇을 의심하랴 / 신무는 집집마다 천추의 사업이니 / 바로 공명을 이룰 때가 바로 이때라네"라고 적었는데, 신무(神武)가 초대 일왕(日王)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지금이야말로 일제에 충성할 때'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완용이 쓴 한시 |
전시에서는 또 당대 묵란도(墨蘭圖)의 두 '라이벌'이었던 흥선대원군 석파 이하응과 민영익의 난 그림을 비교할 수 있고, 안중근 의사가 '국가안위 노심초사(國家安危 勞心焦思)'라고 쓴 액자(보물 569-22호)와 만해 한용운이 쓴 7언율시, 을사늑약 체결 소식을 듣고 목숨을 끊은 민영익의 유서도 볼 수 있다.
'남북공동정부수립과 남한단독정부수립'을 다룬 전시실에서는 공동정부 수립을 주창했던 백범 김구 선생의 글씨 '헌신조국(獻身祖國)'과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한 이승만 전 대통령의 글씨 '민위방본(民爲邦本. 백성이 나라의 근본)'을 나란히 볼 수도 있다.
입장료는 일반ㆍ대학생 5천원, 초중고생 2천원이다.
이완용이 쓴 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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