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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명록

파란바다 한점, 파란 하늘한점 흰구름에 실어 보내 드리리

by 바닷가소나무 2007. 2. 23.

 

제가 태어나서 자랐던 유년의 고향, 그 고향의 푸른 바다와 하늘 입니다

 

들려주신 흔적 남기신다면  푸른바다 한 점, 파란하늘 한 점, 흰 구름에 실어 보내 드리리

 

 

 

 

불물기도

고향 안좌 뱃길의 시하바다 중간 쯤에 있는 무인도다.  

뱃사람들이 정월초하루에 불무기도에 불을 놓아 

그 해 고기잡이의 길흉을 점쳤다는 옛 기억이 떠오른다.

 

 

 

안좌도

 

현재 안좌도 읍동리에는 1910년 백두산에서 자란 나무를 이 곳까지 운반하여 건축한 북방식 “ㄱ"자형으로 만든 기와집인 생가(도지정 지방기념물 제146호)가 잘 보전되어 있어 찾아오는 미술학도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렇듯 김환기 화가의 고향으로 유명한 안좌도는 안창도의 "안"과 기좌도의 "좌"를 합하여 안좌도라 칭하였다. 신안군 14개 읍면의 중앙에 위치한 도서면으로 목포로부터 22.9㎞의 지점(동경 126°08′,북위 34°34′)에 있으며, 유인도 10개, 무인도 53개로 형성되었고 해안선은 91.4㎞에 이르고 있다.

높은 산이 많고 넓은 평야는 없으나, 간석지를 막아 염전과 해태양식 등의 어업소득으로 주민소득은 높은 편이며, 안좌도와 팔금도는 연도교(신안제1교)로 연결되어 같은 생활권이 된 지 이미 오래인데 색다른 정취를 맛볼 수 있는 가볼 만한 곳이다.

또한, 안좌도에는 청동기시대의 유물인 지석묘(고인돌)가 잘 보존되어 있는데 방월리 일대의 지석묘는 도지정 지방문화재자료 제117호로 역사학도들이 즐겨 찾고 있으며, 형식은 바둑판 형의 남방식으로 원래 7기가 있어 “칠성바위”라 불렀다고 전해지나 현재는 4기가 남아있다. 무덤 안에서는 주로 돌칼, 민무늬토기, 돌화살촉 등이 출토되었으며, 안좌도에는 6개 곳에 55기의 지석묘가 남아있다.

안좌도의 특산물로는 김이 유명하며, 신안군을 제외한 다른 지역처럼 부유식 방법이 아니고 지주를 세워 양식하는 방법인데 간만의 차로 물이 들고 날 때 햇볕을 쬐므로 약을 할 필요가 없어 공해가 없고 맛이 좋다. 흔히 파란 파래가 없는 검정색이 짙은 김을 육지에서는 상품으로 잘못 알고 있는데, 안좌의 김을 비롯한 신안군의 김들은 약을 하지 않아 약간의 파래가 섞여 있으며 이 김들이 가장 맛있고 공해가 없는 김이다.

안좌의 또다른 특산물로는 크고 작은 규모의 양식장에서 길러내는 대하(큰새우)가 있다. 민물낚시로는 신촌지가 좋은데 붕어, 잉어, 민물장어가 난다. 바다낚시도 잘 되는데 유명 포인트로는 북지, 도래도, 요력도, 우목도, 반월도 등이 있고, 감성돔, 농어, 숭어가 잘 잡힌다.

안좌도 본섬에는 모래사장이 없으며, 부속섬인 사치도 웃섬에는 조그맣고 아늑한 해수욕장이 있어 한적한 피서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는 제격이다. 사치도 또한 낚시가 잘 된다.

특산물 : 돌김, 대하 등
문의안내 : 안좌면사무소 (☏061-262-4050)
 
 
 
 
 
현재 안좌도 읍동리에는 1910년 백두산에서 자란 나무를 이 곳까지 운반하여 건축한 북방식 “ㄱ"자형으로 만든 기와집인 생가 (도지정 지방기념물 제146호)가 잘 보전되어 있어 찾아오는 미술학도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이렇듯 김환기 화가의 고향으로 유명한 안좌도는안창도의 "안"과 기좌도의 "좌"를 합하여 안좌도라 칭하였다. 신안군 14개 읍면의 중앙에 위치한 도서면으로 목포로부터 22.9㎞의 지점(동경 126°08′,북위 34°34′)에 있으며, 유인도 10개, 무인도 53개로 형성되었고 해안선은 91.4㎞에 이르고 있다.
 
 
김환기 생가
 
수화 김환기(1913~1974) 선생이 태어난 곳이다.
1910년 백두산에서 잘나 나무를 이곳까지 운반하여 건축한 북방식 "ㄱ"자형으로 만든 기와집이다. 선생은 1934년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며, 추상미술운동에 참여하였다. 1936년 일본에서 귀국하여 3~4년 동안 이곳 고향에 살면서 작품활동을 하다가 서울로 올라가서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 때 신사실파를 조직하여 새로운 창작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선생은 동양의 직관과 서양의 논리를 결합한 한국적 특성과 현대성을 겸비한 그림을 구상과 추상을 통해서 실현시킨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양화가이다.
 
 
안좌도 석실고분
 
고분은 삼국시대 이래 사회적 지위나 신분이 높았던 지배층의 무덤을 말한다.
이 무덤은 주로 부여지방에 분포하고 있는 무덤방과 길을 갖춘 괴임식 돌방무덤으로 맞조임식 돌방무덤에서 발전된 것이다. 따라서, 백제가 수도를 사비로 옮긴 후인 6세기중엽~7세기초에 주로 지배층이 사용했던 무덤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돌방무덤이 조사된 사례가 많지 않아서 백제의 무덤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방월리지석묘
 
지석묘는 고인돌이라고도 부르며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큰 덮개돌을 작은 고임돌이 받치고 있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다.
방워리 지석묘의 형식은 바둑판형의 남방식으로 원래 7기가 있어 "칠성바위"라 불렀다고 전하는데 현재는 4기가 남아 있다.
무덤 안에서는 주로 돌칼·민무늬 토기·돌화살촉 등이 출토된다.
안좌면에는 6개곳에 55기가 남아 있다.
 
 
내호고니도래지
 
계8종이 분포하고 우리나라에는 큰고니, 고니, 혹고니가 겨울철새로 도래한다. 온몸이 백색이며 우아한 자태를 가지고 있어 사랑을 받는 종으로 보통 "백조" 라고 불리우며 천연기념물 201호이다.
 
 
양바위 및 음샘
 
대체적으로 남근석은 우리나라 여러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그러나 안좌면 산두리 남근석은 언제 누가 만들었는지 시대는 알 수 없으나 전해오는 설에 의하면 옛날 중국을 왕래하며 교역하던 선박의 등대 역할을 위해 촛불바위를 만들었다는 설과 마을 뒷산에 음바위가 있는데 동네 아낙들이 이 음바위를 보면 바람이 자주나 온 동네가 시끄럽게되자 동네 어른들이 음바위를 쪼개어 두 개의 남근석을 만들어 동네 앞쪽에 세웠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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