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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가 종이에 그린 파스텔화 〈기다림〉(1882경), 48.2×61cm |
움직이는 인체를 그린 소묘의 대가로 인정받고 있다. 여러 재료를 사용했으나, 무엇보다 파스텔을 좋아했다. 발레리나들을 묘사한 회화·드로잉·청동상으로 가장 유명하다. 그외에 당대의 주제를 다룬 작품으로는 초상화 〈카뮈 부인 Madame Camus〉(1869~70)과 구성이 뛰어난 군상들 〈뉴올리언스 목화 거래소 New Orleans Cotton Office〉(1873)가 있다.
유력한 상류 부르주아지 출신으로, 그의 가족은 이탈리아와 미국에 은행 및 기업체 조직을 갖고 있었다. 루이르그랑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한때 법률을 공부하면서 법률가가 되려고 했으나 1855년 미술학교에 입학했고, 화가인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의 제자 루이 라모드의 화실에 들어갔다. 앵그르는 소묘와 그 주제에서 이론적 정통성을 옹호하는 화가로서의 위치를 오랫동안 유지했지만, 외젠 들라크루아의 낭만주의와 쿠르베의 사실주의의 도전을 받고 있었다.
젊은 드가는 프랑스의 위대한 전통 속에서 역사적 주제를 다루는 화가로서 정통노선을 계승하고 싶어했던 것 같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는 피렌체·아시시·로마·나폴리를 방문했고 정교한 인물소묘로 유명한 안드레아 만테냐, 산드로 보티첼리, 한스 홀바인, 니콜라 푸생 등의 그림을 자세히 관찰하고 묘사했다. 1860년 이전 드가는 훌륭한 가족 초상화 몇 점을 그렸는데, 그동안 쌓은 훈련의 효과는 이 초상화에 뚜렷이 드러나 있지만, 분명히 19세기 중엽의 화풍인 말쑥하고 기민한 도회풍이 그 효과를 더욱 높여주고 있다.
〈모르빌리 공작부인의 초상 Portrait of the Duchess of Morbilli〉은 그 초상화들 중에서는 전형적인 작품이다. 이 그림은 앵그르의 화풍에 따라 다소 평면화된 사물이 큼직하고 단순한 표면에 대담하게 그려져 있다. 짙은 채색이지만 섬세하며 검은색을 많이 쓰고 변화가 뚜렷하지 않아 색채는 차고 절제된 느낌을 준다. 1860년 드가는
〈스파르타 젊은이들의 훈련 Young Spartans Exercising〉을 발표하여 고전적 주제를 다루는 화가로 데뷔했다. 이 그림의 벌거벗은 인물들은 균형잡힌 집단 속에 배열되어 있기는 하나,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디아를 배경으로 한 이상적인 인체들이 아니라 자연의 경치 속에 사실적으로 그려진 청소년들이다.
1861년 이후에는 다시 전통을 따르려는 의도를 가지고 〈바빌론을 세우는 세미라미스 여왕 Semiramis Founding Babylon〉을 그렸으나, 결국 역사화를 포기하고 파리의 분주한 도시생활 속에서 자신의 주제를 찾기 시작한 것 같다. 이 점에서 그는 쿠르베와 에두아르 마네(드가는 1862년 마네를 만났음) 같은 동시대인이나 당시의 소설가들, 그리고 1850년대에 발견된 놀랄 만큼 형식적이면서도 기록적인 특성이 있는 일본의 판화미술에 영감을 받은 것 같다. 그는 당시 프랑스의 판화가인 폴 가바르니와 오노레 도미에의 뛰어난 작품들도 간과하지 않았다. 1862년 드가가 롱샹 경마장의 기수들과 말타는 모습, 멋지게 차려입은 관중들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한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그 직후에 드가는 음악가들과 무대에 서는 사람들의 초상화들을 그리기 시작했는데, 이는 모델들이 익숙한 동작에 몰두해 있는 다른 모든 주제들과 함께 그의 평생을 사로잡았다. 여기에 속하는 첫번째 작품은 〈발레 '샘'을 추고 있는 피오크르 양 Mlle Fiocre in the Ballet 'La Source'〉이다. 1870년대에 그린 초상화들은 처음 작품들보다 훨씬 평이하고 자연스럽지만, 여전히 홀바인과 이탈리아 북부의 위대한 초상화가들을 연구하며 훈련받은 영향이 나타나 있다.
1870~71년에는 보불 전쟁 포병대에서 복무했다. 프랑스로 돌아오는 길에 그는, 군대 이동중에 만난 야심만만한 인물들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고, 무대와 오케스트라의 사람들에 대한 습작도 계속했다. 이때부터 그는 인물의 배치를 바꾸고 사진을 찍는 방식으로 비정통적인 단절과 원근법을 이용하여, 야외와 실내의 순간적인 광경을 표현하기 시작했다. 그가 형태에 관해 워낙 뛰어난 감각과 기량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힘겨운 순간적 주제들에 균형감을 부여할 수가 있었다.
〈콩코르드 광장 Place de la Concorde〉은 이것을 보여주는 훌륭한 본보기이며, 실내에서 발레가 빠른 움직임 속에서 포착된 인물들을 그릴 수 있는 무한한 기회를 드가에게 제공해주었듯이 야외에서는 광장이 그런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1872년 10월 미국을 방문하여 5개월 동안 머물면서, '직업적인' 동작에 몰두해 있는 인물을 그린 가장 유명한 그림 중 한 작품을 완성했다. 이것이 바로
〈뉴올리언스의 목화 거래소〉로 현재 프랑스 포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드가는 역사적 인물들을 그리겠다는 초기의 야심을 완전히 버렸지만, 이 그림에서는 전통적인 형식의 구성원칙을 충분히 활용하고 있다. 1870년대의 드가의 인물화는 대부분 상당히 넓은 공간을 배경으로 삼았고, 인물들은 이 공간 속에 충분히 여유를 두고 배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1870년대말에 이르자 그는 인물들의 좀더 가까운 밀착이나 겹쳐진 그림의 회화적 가능성에 흥미를 갖게 되었고, 인물들 사이의 빈 공간이 갖는 형태적 특성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이 좀더 발달한 단계를 보여주는 것이 1884년 완성된 유명한
〈다리미질하는 여인들 Repasseuses〉이다. 공간이 부자연스러울 만큼 얕으며 16세기 중엽의 베네치아 미술을 연상시키는 밀집된 형태들과 평면을 조화시킨 이 그림에 평범하고 일상적인 주제를 사실적인 눈으로 본 바를 첨가시켰다. 이무렵 드가는 이미 파스텔 작업을 시작했고, 때로는 휘발성 기름과 파스텔을 섞어서 사용하기도 했는데, 위에서 언급한 연구를 계속하여 목욕하는 여인들을 그린 실내 그림들을 그렸다. 몇몇 후기 작품들은 입체감과 패턴이 있는 평면의 놀라운 조화를 보여준다. 피부색은 인상파 화가들의 '점'보다 더 촘촘하고 순수한 색조의 긴 붓질로 되어 있지만, 인상파 그림과 마찬가지로 약간 멀리서 보면 붓질들이 어우러져 단단한 입체감을 이룬다.
1880년부터 드가는 이따금 조각도 했으며, 무희들, 목욕하는 여인, 말 등의 작은 청동상들은 간과하기 쉬운 인간과 동물의 움직임이 가진 잠재력을 드러내는 그의 능력을 다시 한 번 보여주었다. 드가는 아마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과 동물의 움직임을 연구할 때, 동물 모델과 인간 모델을 똑같이 냉정한 눈으로 본 사람일 것이다. 그는 사진에 관심이 있었고, 그의 시각과 고속 사진기의 시각에는 유사성이 있다. 드가는 말년에 시력을 잃어 한쪽 눈은 완전히 실명했고 나머지 눈도 그와 비슷한 상태였다. 그는 죽을 때 동시대인들의 소묘와 회화를 모은 중요한 컬렉션과 대부분 14행시 형식의 시가 들어있는 습작공책을 남겼다.
D .C. T. Thomas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