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전】{삼국유사} 권 3 '조신조(調信條)'
옛날 신라가 서울이었을 때 세규사 장원이 명주군 내리면에 있었는데 본사(本寺)에서 중 조신을 보내어 장원 관리를 맡아 관리하게 했다. 조신이 장원에 와서 태수 김혼공(金혼공)의 딸을 좋아하여 깊이 미혹(迷惑)되었다. 그는 여러 번 낙산사 관음보살 앞에 나아가 그녀와 인연 맺어줄 것을 남몰래 빌었다. 이로부터 수년 사이에 그녀에게 이미 배필이 생겼다. 그는 또 불당에 나가 관음보살이 자기의 소원을 들어주지 않는다고 원망하며 날이 저물도록 슬피 울다가 그리운 정에 지쳐서 잠시 졸았다. 꿈 속에 갑자기 김씨 낭자가 기쁜 얼굴로 문으로 들어와 활짝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도 일찍 스님을 잠깐 뵙고 마음 속으로 사랑하며 잠시도 잊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모의 명령에 못 이겨 억지로 다른 사람에게 시집을 갔습니다. 지금 동혈지우(同穴之友)가 되고자 하여 왔습니다." 했다.
이에 조신은 매우 기뻐하며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와 40여 년간 살면서 자녀 다섯을 두었다. 집은 단지 네 벽뿐인데 조식(粗食)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마침내 낙탁(落탁)하여 식구들을 데리고 사방으로 떠돌아 다니며 얻어먹고 지냈다. 이같이 10년 동안 초야를 두루 헤매니 갈갈이 찢어진 옷은 몸뚱이도 가리지 못했다. 때마침 명주 해현령(蟹縣嶺)을 지날 때 15세 된 큰 아이가 갑자기 굶어 죽으매 통곡하며 길가에 묻었다. 남은 제 식구를 이끌고 그들 내외는 욱곡현(지금의 우현)에 이르러 길가에 묘옥을 짓고 살았다. 그들 부부는 병 들었으며 게다가 굶주려서 일어나지 못하였다.
10살 난 계집아이가 밥을 얻으러 다니다가 마을개에게 물려 아프다고 소리 지르며 앞에 와서 눕자 부모도 목이 메어 눈물을 줄줄이 흘렸다. 부인이 눈물을 씻으며 갑자기 말했다.
"내가 처음 그대를 만났을 때는 얼굴도 아름답고 나이도 젊었으며 입은 옷도 깨끗했었습니다. 한 가지 맛있는 음식도 그대와 나누어 먹었고 옷 한 가지도 그대와 나누어 입어 집을 나온 지 50년 동안 정은 깊어졌고, 사랑도 굳게 얽혔으니 참으로 두터운 인연이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근년에 와서는 몸이 쇠약하여 병이 해가 갈수록 깊어지고 굶주림과 추위가 날로 더욱 심해지니 남의 집 곁방살이나 변변찮은 음식조차도 빌어 얻을 수가 없게 되었으며 문전마다 걸식하는 부끄러움은 산더미보다 무겁습니다. 아이들이 추위에 떨고 굶주려도 미처 돌봐 주지 못하는데 어느 틈에 부부의 정을 즐길 수가 있겠습니까? 붉은 얼굴과 어여쁜 웃음도 풀잎에 이슬이요, 지란(芝蘭) 같은 약속도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입니다. 당신은 내가 있어 더 누가 되고, 나는 당신이 있어 더욱 근심이 됩니다. 가만히 지난날의 기뻤던 일을 생각에 보니 그것이 바로 근심의 발단이었습니다. 그대와 내가 어찌해서 이런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여러 마리의 새가 함께 굶어 죽는 것보다 차라리 짝 잃은 난새가 거울을 향하여 짝을 부르는 것만은 못할 것입니다. 추우면 버리고 더우면 따르는 것은 인정에 차마 할 수 없는 일이지만 행하고 그치는 것은 사람 마음대로 할 수 없는 것이고 헤어지고 만나는 것도 운수가 따르는 것입니다. 청컨대 부디 헤어집시다."
조신이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각각 아이 둘씩 나누어 떠나려 하면서 여자가 말하기를,
"나는 고향으로 가겠으니 당신은 남쪽으로 가십시오." 했다.
이리하여 서로 작별하여 길을 떠나려 하는데 꿈을 깼다. 타다 남은 등불은 깜박거리고 밤도 새려고 하였다. 아침이 되니 수염과 머리털은 모두 하얗게 새고 망연히 세상일이 뜻이 없어졌다. 이미 괴롭게 살아가는 것도 싫어지고 마치 한평생 고생을 다 겪고 난 것과 같아 재물을 탐하는 마음도 얼음 녹듯 깨끗이 없어졌다. 이에 관음보살의 상을 대하기가 부끄러워지고 잘못을 뉘우치는 마음을 이기지 못하였다. 돌아와 해현에 묻었던 아이의 무덤을 파 보았더니 그것은 바로 석미륵(石彌勒)이었다. 물로 깨끗이 씻어 근처의 절에 모시고 서울로 돌아가서 장원을 맡은 책임을 그만두고 사재(私財)를 기울여 정토사(淨土寺)를 세워 부지런히 착한 일을 했다. 그 후에 그의 죽음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 삼국유사 제 3권 김봉두 편역(교문사, 1993) PP.378∼380
이 설화는 이광수의 [꿈]이라는 소설과 관련이 있다.